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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집] 가슴에서 터져 나온 “만세” 함성, 마침내 ‘民國의 시대’ 열렸다

서현우

입력 2020. 02. 27   17:18
업데이트 2020. 02. 2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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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 101주년… 그 의미를 되새긴다

 
학생 시위에서 민중 시위로
항일투쟁에서 독립운동으로 확장
국권 회복 위한 민족 열망 폭발한 역사적 사건




독립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독립문 상부의 태극기는 3·1운동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
독립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독립문 상부의 태극기는 3·1운동 이전에는 볼 수 없었다.

   
한 세기 전인 1919년 3월 1일, 우리는 대한독립의 염원을 담아 목 놓아 만세를 외쳤다. 일제 치하 우리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던 당시의 외침은 도시에서 지방으로, 다시 한반도에서 중국 대륙으로, 또 바다 건너 미국과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단지 독립을 향한 민족의 열망을 넘어 국제사회에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알린 역사적 사건이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였다. 3·1운동 101주년을 맞아 그 역사를 되새기며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조명한다.



1919년 3월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1919년 3월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수많은 사람이 만세를 외치고 있다.



3·1운동의 확산, 시대의 변혁을 이끌다

3·1운동은 혁명이었다. 그 중심은 서울을 비롯한 도시였다. 서울을 비롯해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원산, 선천 등 도시에서 시작된 3·1운동 시위는 전국 주요 도시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다시 지방 도시와 농촌으로 이어졌다. 3월 1일 이후 서울 시내 곳곳에서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규모의 시위가 매일 계속됐고, 여파는 서울 주변 고양, 시흥, 장단, 개성, 수원, 강화 등지로 번졌다. 3월 첫날의 울림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더욱 크게 퍼져나간 것이다. 집계에 따르면 시위의 절정은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까지였다. 전체 시위의 약 60%가 이 기간에 일어났다.

3·1운동은 학생시위에서 민중시위로 발전하며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3·1운동이 가진 확장성이다. 3월 1일 시위의 중심은 학생과 지식인 계층이었다. 이후 3·1운동 초기 지속적으로 이어진 서울 시위에서 주도적으로 참여한 계층도 이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3·1운동의 주도적 참여 계층이 기존 학생·지식인에서 노동자·상인·농민 등 일반 대중으로 확대됐다. 3·1운동 시위로 체포된 사람들의 직업이 대부분 공장 직공, 상점의 피고용인, 영세 상인이었다는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국사편찬위원회가 지난해 2월 공개한 3·1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3·1운동 시위 횟수는 총 1692건이었다. 3월 14일까지 2주간은 276회의 시위가 있었는데 이 중 약 70%인 197회가 서울과 북부지방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3월 중순을 넘어서는 경기도와 중남부 지방에서 다수 일어났다. 전국적으로 하루 평균 50~60회의 시위가 이어졌다.

이 같은 사실은 3·1운동이 시간적·지역적·계층적으로 확산·확대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3·1운동에 참여한 인원은 20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발간한 『한일관계사료집』은 시위 참가 인원을 168만1648명으로, 박은식이 지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202만3098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9년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약 1678만 명이었다. 얼마나 많은 민중이 시위에 참여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시위가 개개인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졌다는 점은 3·1운동의 확장성과 함께 동시다발적인 성격을 나타낸다. 3·1운동 당시 나온 독립선언서는 200개가 넘는다.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개별적인 상황에 따른 독립선언서가 낭독됐다. 이 때문에 3·1운동이 조직적으로 퍼져나갔다기보다 곳곳에서 동시에 일어났다고도 볼 수 있다. 지역마다 크고 작은 시차가 발생했지만, 시위가 가진 성격과 흐름은 동시다발적이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점은 3·1운동의 선후 관계가 아니라 일제에 대항해온 하나의 뜻으로 일궈낸 민족정신에 있다.


미국 컬럼비아대 유니언신학교의 버크도서관이 공개한 3·1운동 당시 모습. 수많은 군중이 서울에서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이 자료는 버크도서관이 지난 2006년 인터넷에 올려놓은 것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 컬럼비아대 유니언신학교의 버크도서관이 공개한 3·1운동 당시 모습. 수많은 군중이 서울에서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 이 자료는 버크도서관이 지난 2006년 인터넷에 올려놓은 것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선교사가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3·1운동의 영향, 국제사회에 평화를 외치다

독립만세운동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일어났으며, 각국 언론을 통해 소개되면서 반향을 일으켰다. 만주와 간도, 연해주 일대가 대표적이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및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일제의 탄압을 피해 간도 지역으로 이주·정착한 조선인들은 조국을 떠나 낯선 곳에 정착했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전해지자 이들은 그 정신과 염원을 함께하기 위해 1919년 3월 13일 간도 지역인 용정 서전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3·13만세운동으로 불리는 이 시위에는 8만6000여 명이 참여했고, 간도·만주 지역 곳곳으로 다시 퍼져나갔다.

중국의 신문들은 3·1운동을 크게 보도했다. 3·1운동 중 발생한 일제의 잔인한 폭력 진압을 강하게 비난했다. 상하이 국민일보는 1919년 3월 12일부터 5·4운동이 발생한 5월 4일까지 20회 이상을 보도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보도한 셈이다. 영자신문인 북경 데일리 뉴스는 거의 매일 3·1운동 소식을 전했다. 중국의 언론 보도들은 특히 중국 학생들에게 자극을 줬다. 학생들은 우리 3·1운동과 관련한 기고를 꾸준히 내며 3·1운동을 본받아 중국민들도 일제에 대항해 궐기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 정부는 우리 독립운동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지만 3·1운동은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1919년 3월 20일부터 3·1운동을 비롯해 우리 독립운동과 인권 상황에 대해 다루기 시작했고, 미국연합통신(AP)은 1919년 3월부터 이듬해 12월 사이에 한국 관련 기사를 약 9000회 보도했다. 대부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내용이었고, 일본에 유리한 기사는 50여 건에 불과했다.

미국 언론의 주목은 미국 내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던 애국지사들이 외교적 선전을 하는 힘이 됐다. 미국 정부와 달리 미국 의회에서는 3·1운동을 두고 지속적인 발언이 나왔다. 1919년 6월에는 셀던 스펜서 상원의원이 한국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언급하며 미국이 어떤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지를 국무장관이 의회에 보고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7월에는 조지 노리스 상원의원이 한국 문제 전반에 대해 지적하고 식민통치 실상을 담은 자료를 의회에 제출하면서 일본의 한국침략을 비난했다. 노리스 상원의원은 사후 2016년에 우리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3·1운동은 당시 한국민들의 항일투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당시 일본이 3·1운동을 식민지 내 국내문제로 간주했더라도 미국·영국처럼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실질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열강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3·1운동의 파급, 대한민국의 독립을 이루다

3·1운동은 시대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도 의미적 확장성을 갖는다. 1910년 대한제국 국권 상실을 거쳐 맞이한 3·1운동은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제국의 시대에서 민국의 시대를 불러왔다. 신민에서 국민으로의 변화다. 민족의 독립을 선언한 평화적 시위였지만 결과는 혁명이었다. 신분제가 사회구조의 바탕이었던 당시 3·1운동은 계층과 신분을 초월한 민족의 일치단결을 이뤄냈다. 3·1운동 앞에 민족 모두는 평등했고, 그 목소리는 단결됐으며 그 뜻은 확고했다.

또 3·1운동은 침체한 독립운동의 의지를 불태우고 투쟁의 세류를 모아 체계적인 독립운동으로 변화시켰다. 3·1운동 이전 독립운동의 흐름은 의병·의열 투쟁이었다. 국권이 침탈된 이후 국가가 아닌 개인·단체·조직으로서 일제 군대에 맞섰다. 이런 양상의 변화는 3·1운동이 기점이었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 결정적이었다. 독립운동 단체들의 임시정부 수립 논의는 3·1운동 이전부터 있었다. 통합의 필요성이 꾸준히 이야기돼 왔다. 3·1운동에서 나타난 민족적 열망은 이를 하나로 뭉치는 불쏘시개였다. 3·1운동은 임시정부 수립을 이뤘다.

임시정부를 통해 각지의 독립군이 통합하고 임시정부의 군대로 일본에 맞섰다는 점에서 3·1운동은 독립전쟁의 시발점이라는 의미도 존재한다. 실제로 임시정부가 제작한 『한일관계사료집』을 보면 3·1운동 참여 군중을 ‘독립군’으로 표현한다. 3·1운동이 의병·의열 투쟁과 독립전쟁을 잇는 매개체라는 점을 보여준다. 임시정부 역시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일본과 개전해 독립군의 전투가 독립전쟁임을 명확히 했다.

김경록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은 “19세기 중반 이후 국제관계와 국내정세에 의해 침탈당한 국권을 회복하고자 민족적 대응으로 일어난 3·1운동은 독립에 대한 한민족의 열망이었다”며 “국제사회에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3·1혁명으로 불려 마땅하다”고 평가했다. 서현우 기자/사진=독립기념관·연합뉴스


“의병·독립군·광복군으로 이어진 정신… 국군의 뿌리죠”

[인터뷰] 김경록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군사사 측면에서 본 3·1운동  

“3·1운동은 독립을 염원하는 행동뿐만 아니라 식민통치의 강압·탄압에 대한 저항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또 완전한 독립을 외친 선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3·1운동을 넘어 3·1혁명으로 새롭게 인식해야 합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김경록 선임연구원은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운동의 흐름이 변화했다며 이같이 말했다. 항일의 의미가 강했던 기존 독립운동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이를 통한 독립전쟁으로 연결시킨 구심점이 바로 3·1운동이라는 설명이다.

특히 김 선임연구원은 군사사 측면에서 3·1운동을 분석하며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계기가 됐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각 지역에 산재해 항일·항쟁하던 독립군을 하나로 통합했고, 1920년 독립전쟁 원년을 선포했다. 그리고 독립군은 그해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3·1운동과 그 정신이 독립군을 체계화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나아가 1940년 광복군 창설로 이어졌으며 국군의 뿌리가 됐다.

이와 함께 김 선임연구원은 “3·1운동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군자금과 독립자금 모금도 더욱 활발해졌다”고 말했다. 독립군이 하나로 통합하면서 군자금 모금과 사용도 임시정부로 체계화·일원화됐고, 국민이 더욱 적극적으로 이에 참여했다는 이야기다.

또한 김 선임연구원은 “일제의 군사강점에 대응한 의병·독립군이 3·1혁명과 임시정부 수립을 계기로 독립전쟁을 본격 수행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며 “의병, 독립군, 광복군 그리고 국군으로 이어지는 군사적 정신 및 전통을 계승한다는 마음으로 3·1혁명의 군사사적 의미도 함께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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